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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리더십과 몽골제국의 형성

Posted by JS토크
2018. 2. 28. 22:41 정치,인물

징기스칸과 몽골제국의 형성 (칭기즈칸의 리더십) (Genghis Khan, 成吉思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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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분 짜리 동영상이에요

 

 

 

 

 

징기스칸과 몽골제국의 형성 (칭기즈칸의 리더십) (Genghis Khan, 成吉思汗)

 

         징기스칸 (역사상 세계 최고의 패왕이자 몽골에서는 신으로 불리는 사나이)

 

                                                                 출생~사망     1162년 -1227년

 

                                                                재위기간       1206- 1227년

                                    

                                                                지역                 아시아

                                                            

                                                     왕조                 몽골제국

 

여담이지만 지금도 몽골에서는 징기스칸(칭기즈칸의 재림을 기다린다고한다.

 

 

 

1. 징기스칸  몽골에 태어나다.

 

12세기 몽골 부족사회에서 징기스칸이 태어났다. 

 

 

샤먼은 " 이 아이는 신이 지상에 내려온 것이라 말하며  몽골부족을 크게 융성시킬 아이니  징기스칸의 아버지에게 잘 키워달라" 고  당부했다고한다. 

샤먼의 예언처럼  징기스칸은 훗날 역사상 최고의 제왕이 되었는데,  여기에 기가 막힌 조물주의 법칙이 숨어있는 듯하다.

 

징기스칸의 아버지는 예수(?)게이 였는데 , 

 

 

마음속에 떠오르는게 없는가? 

하하 눈치챈 사람말고는 비밀로 하기 약속해요.

1162년 오늘날 몽골과 시베리아의 접경지역인  오론강 기슭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보르치킨족의 족장 예수게이와 올크누트부족 출신 후엘룬사이에 태어난 태무진이 바로 그다. 

하지만  테무진이 9살 되었을때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보르테와 약혼시키고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만다.

 

이 당시 몽골 부족사회는 수십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져  서로싸우고 약탈하며 상대 부족 여자를납치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극한의  추위와 먹을 것이 부족한 환경탓에 수십 개의 부족들은 단합하지못하고, 

 

 

서로 뺏고 죽이며 자기부족의 안위만을 챙기던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런 환경속에  갑자기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어버리자 테무진과 그 가족들은 부족에게서 버려졌다.

불과 9살된 테무진은 가족들과 함께 오론강 기슭에서 채집과 사냥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된 것이다.

 

 

 

이때 테무진은  숙명의 라이벌 자무카와  안다 즉 의형제를 맺었고,  사냥의 규칙을 어긴  배다른 형 백테르를 활로 쏴 죽인다. 

 

척박하고 극한의 땅에서 살아야했던 테무진은 사냥의 규칙을 만들고 서로 협동하여 사냥하고 사냥물은

 

 공과에 따라 공평히 나누기로 했는데

 벡테르가 이걸 여겼기 때문이다. 불과 9살의 테무진은 이런 삶의 방식을 깨우쳤던 것이다.

 

1178년 16살쯤의 테무진은  부르테와 혼인하고, 수십개의 부족 중 강한 부족이었던 케레이트 옹칸에 휘하에 들어가 의지한다.

 

 

케레이트 부족은  926년 발해멸망당시  발해유민으로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뿔뿔히 흩어졌고,

 

 

훗날 몽골제국의 유럽정벌에 따라나서 지금은 카자흐스탄을 이루는 소수국민으로 살고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런 소수국민을 위해 단군동전까지 만들 었다고 하니,   카자흐스탄 계보 역시 단군을 이었다는 의미심장한 추측을 해본다.

 

 

 

 

 

 

 

 

테무진이 성장하는 과정중에는 아내 부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빼앗긴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원래 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도 메르키트부족 사내와 결혼하려 했었느데,

 

테무진의 아버지가 납치한 것이었으니 이 당시 몽골 부족사회의 열악한 시대상황을 알만하겠다. 

메르키트 부족은 이런 오래된 원한을 이유삼아 테무진의 아내를 납치한다.

 

테무진은 몹시도 마음아팠지만 인내하고 힘을 기르며  옹칸과 안다인 자무카를  끌여들여   마침내 메르키트 부족을  공격하여  승리한다.

하지만 막상 아내 부르테를 구출하니 이미  부르테는 메르키트 부족사내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징기스칸의대범함과 영웅적인 모습을  알수 있다.  사실 이 문제로 징기스칸은 몇 일을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끝없는 명상과 고민으로 차후 행동을  결정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아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임신한 아이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 아이가 훗날 주치가 되는것이고, 

 

 

몽골제국의 영토확장에  큰 기여를한다.

 

 

만약 징기스칸이 형식적인 모습으로 아내를 용서하고 주치를 용서했다면, 주치는 훗날 징기스칸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컷을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고,

 

 추호의 차별없이 아내와  주치를 대했기에,

 

 

징기스칸의 제국은 세워지고 경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같은 현대 사회에서도  아내가 납치당해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하고 오면 받아들일 남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당시 테무진은 아내가 잘못 없음을 인정하고,

 

아내가 임신한 주치 역시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내로, 사랑하는 자식으로 받아들인다.

결과론적으로  이러한 테무진의 마음가짐은 몽골제국이 부족이나 가족같은 혈통이 아닌 능력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테무진은 아들 주치와 옹칸의 딸을 결혼 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처음엔 옹칸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내심 테무진의 군계일학적인 모습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옹 칸의 자식들이  테무진이 옹칸 사후  부족을 정복할 것이라는 계속되는 반대 의견을 보이자 

 

옹칸 역시 테무진을 죽일 계획을 세우게된다.

 

이 당시 테무진은 옹칸의 급습 공격에 대처하지 못했고, 따르는 부하들과 도망쳤는데,  옹칸의 부하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부하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테무진을 지킨다. 

 

 

몽골  부족사회에서의  싸움은  숫자가 많은 부족이 적은 부족을 이기는건 당연한 것이었고,  질 것같으면 우두머리를 버리고  도망치는게  관례였는데 이것을 테무진의 부하들이  깬 것이다. 

 

 

그만큼 테무진과  부하들과 관계가 단순한 상하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였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고

테무진의  인품과 부하 통솔 리더십을 볼 수있는 한 단면이 되는 것이다.

 

 

이 때  '발주나의 맹약'이 맺어졌는데,  옹 칸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19명의  부하들이 흙탕물을 마시며 맹세를 한 것이고,  그걸 '발주나의 맹약'이라 한다.  그 들 19명은 친족도 아니고, 같은 부족들로 모인 게 아니었다. 

 

 

부족도 다르고 , 친족도 다른  19명의 사람들이  과감이 전통, 혈통 사회의 가치관을 깨버리고 모인 것이다.

 

서로 공통된 목표를 위해 동료로 뭉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이 있다 하겠다.

 

훗날 우리가 다시 만주고토 수복을위해 나선다면 배워야 할 부분이다. 

 

 

 

그 뒤 테무진은  힘을 키워  옹칸의 케레이트족과 싸워 이기고, 이 여세를 모아 나이만까지 정복한다. 이때  테무진은 자신의 안다  자무카와  숙명의 싸움을 벌이고 승리한다. 승리한후 자무카와 함께 하고싶었으나,

 

 

 

자무카는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음을 알고 죽음을 선택한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연다. 

쿠릴타이는 부족들의 집합의사를 표현하는 회의기구로  쿠릴타이로 만장일치 되어 새로운 지도자가 나올때마다  몽골부족은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했다. 

 

 

우리나라 역시 신라의 화백, 백제의 정사암 같은 귀족 회의 기구가 있었고,  이것은 몽골의 쿠릴타이와 같은 개념이다. 

이 때  테무진은  징기스칸 이라는 지도자가로 선출된다 .

 

 

 

 

 

 

 

징기스칸이 48세 되던 해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한다. 

이에 징기스칸은 평소 계획했던 금나라 정벌의 시기가 왔음을  알고  금나라와 전쟁을 선포하고, 기병 6만 5천여명으로 금나라를 공격한다. 

 

 

몽골군의  말은 크기는 작은대신 체력이 좋아  먼 거리를 이동해도 지치지 않았고,

몽골군 특유의 건조한 육포는  휴대하기 편하고

 

말위에도 식사가 가능한 큰 장점이 있어 전쟁에서 최고의 기동력을 살릴수 있었다. 

후에 수백년이 흐른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나타나

 

전쟁의 기동력을 살리기위해  통조림을 사용했다고 하니 , 

 

징기스칸의 마른 육포 사용은 시대를 앞선  혁신적이고, 획기적인 전쟁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징기스칸은 금나라를 정복하고,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차지한 호라즘과 교역을 준비한다.

 

이당시 징기스칸은  호라즘을 정복할 생각이 없었고, 호라즘과의 상업적 교역을 원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의자존심이 걸린 트러블이 발생했고, 술탄 무하마드 2세는 징기스칸의 사신을 죽이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평소, 징기스칸은 자신이 파견한 사신은 징기스칸  본인의 얼굴 , 본인이라고 생각했기에 사신을 엄청 소중히 여겼는데, 사신이 죽어버리자  분노에 차서 호라즘 공략에 나선다. 

 

 

강대국이라 평가할 수있는 호라즘은  징기스칸 군대에 의해 철저히 무너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볼 것은 사신을 죽여서 호라즘을 박살된 징기스칸이  왜  사신을 죽인 고려는 침공하지 않았느냐이다.  병법에도 가까운데 있는 적을  우선순위로 침략 정복하여  물자와 병력을 충원받고, 

 

 후방에서 공격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걸 최고로 치는데 말이다.

 

 

징기스칸 부하들 역시  고려먼저 정벌하자고 수십번을 얘기해도  징기스칸은  못들은 척 웃으며 넘겼다고 하니 그 의도가 상당히 궁금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지않겠다.  물론 아는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1.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가 뛰어난 장군이 되도록 지도한점 - 수부타이, 바투 ,무칼리, 제베 등 뛰어난 장수와 수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지도하여  그 한사람 한사람이 세계사 뛰어난 장군에 이름을 올리게한 점. 

 

수부타이는 역대 세계최고의 장군 다섯손가락에 들어갈 만큼 강력한 장군이라고한다.

 

 

더불어 징기스칸 아들들 역시 뛰어난 인재들이라  징기스칸 사후 징기스칸이 이룩한 땅 덩어리를 두배로 넓히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2. 새로운 기술 문명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  문화를 이루고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사용한점-  다른 나라를 침략할때  그나라를 정복한후 그나라의 기술을 배척하지 않고 흡수하여,  군사전략으로 사용한 점은 몽골군의  공통된 모습. 

 

 

 화약을 사용하여 유럽군과 싸운것이나 포로들을 통해 배운 공성전 전술과 무기를 받아들이고 포로 기술자들을  대우한점 .

그리고  그 기술을 정복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한 점은  징기스칸의 열린 리더십이 있기에 가능했다.

 

 

3. 능력에 따른 공과를 분명히하고 재물을 혼자 독식하지  않고  공평하게 나눈점 - 징기스칸의 몽골군은  다른 나라를 침략할시 

적을 죽이는 과정에서 나오는 엄청난 재물을 수뇌부나 군사가 전투 도중에 차지 한다거나, 독식하지 않았다.

 

 

명령과 규율이 명확이 잡혀있어서 싸움중에는 규율을 지키고, 전쟁 승리후에 재물을 공과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는 선진적인 시스템을

사용했고,  이러한 점은  시대를 앞서는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4.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점 - 각나라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었고, 정복자들은 다른 나라를 정복할시에 종교를 탄압했다.

 

근세 유럽만 하더라도  마녀사냥이라고 해서 가혹한 종교탄압을 하지않았던가? 하지만 징기스칸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자기 종교에 따라 생활하는걸  허용했다.

 

 

징기스칸의 이러한 리더십은 아들들에게도 잘 전해져서 불과 70년만에  몰골제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항하지 않으면  그나라 고유의 통치방식, 종교를 인정했던 징기스칸의 대범한 리더십은 분명 시대를 훨씬 앞선  혜안이었다.

 

 

5. 국가 공통목표를 천명하고  국민을 단합시켜 비전을 가지고 온국민이 함께 나아간점-  몽골부족사회는 극한의 추위와 열악한 환경탓에  부족들끼리 단합하지 못하고 약탈,납치, 살인으로  몽골 부족 사회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징기스칸은 부족들을 통일시키고, 그 힘을 단합시켜  눈을 외부로 돌려 파이를 키운뒤에 다른 나라로 부터 물자와 자원을 얻는 방식을 통해 몽골 부족사회의 발전과 풍요를 가져왔다. 

 

 

징기스칸이 태어나기전에  극도의 추위와 가난 부족들의 싸움으로 내부 발전을 하지못하고 , 춥고, 배고파  얼어죽던 사람들은 징기스칸이라는 지도자를 통해  꿈을 키우고 몽골 부족 특유의 장점을  깨닫고 세계를 향해 진격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세계사의 전기를 이룰 수 있었다.

 

 

 

6. 전쟁을 준비함에 있어서 끝임없는 시뮬레이션과 토론과정을 거쳐 이길수 있다는 확신이 들때 비로소 공격한점 - 징기스칸의 시대를 앞서는 리더십을 볼때면 깜짝깜작 놀란다.

이런 시뮬레이션을 철저히 하는게 미국이고,  현재의 미국을 보면서 징기스칸의 몽골을 가장 잘 배운 나라가 아닌가 싶다.  

징기스칸은 전쟁을 준비함에 있어 자신의 뛰어난 장수들이 서로 토론하고 전술을 짜는걸 

 

진두지휘 하는 역활을 하며  자신의 부하들이 뛰어난 전략가, 뛰어난 장군이 되는 방법을  전수했다.

 

 

뛰어난 영웅  한명이 나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지는게 아닌,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을  자신 옆에 서는 위대한  장군으로 만든 점은 이러한 시대를 앞선 징기스칸의  탁월한 리더십에 있었다.

 

 

7. 잘못이 없는 자신의 아내를 용서한 것처럼, 칸의 권력을  남용하지않고  관용을 베푼점 - 징기스칸의 아내가  다른 부족의 아이를 임신했을때 ,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아내를 용서한 점은 징기스칸의 인품과 관용을 볼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몽골군이 유럽침공 했을때  몽골군에는 유럽인이  있었다고한다. 

 

 

국적이 어디던 어느나라 사람이던 상관없이 가치관과 목적이 맞는다면 동료로 함께 가는 몽골군의 전략은 징기스칸의 가르침에서 나왔으며, 어느나라 국적이던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함께 갈 동료들은 차별하지 않고

 

포옹하는 징기스칸만의 

리더십은 시대를 너무 앞선 혁신적인  것이었다.

 

 

 

 

 

 

 

징기스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서하 공격을 준비한다.

 

 

탕구트는 이미 항복했지만 호라즘 원정때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탕구트 정복을 위해 고비사막을 넘어가던 1226-7년사이  징기스칸은 진군중 잠시 휴식겸 야생마를 사냥한다.

이때 야생마들이 갑자기 징기스칸에게 돌진하자  깜짝놀란 말이 날뛰어  징기스칸은 말에서 떨어지는 큰 부상을 당한다.

 

 

하지만 탕구트와의 전쟁은 계속했고,, 징기스칸의 상태는 더욱악화되어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1227년 8월

하늘은 징기스칸을 데려간다.

 

 

징기스칸은 자신이 죽은후에도  세상을 향한 진군을 멈추지말 것을 유언했고, 이를 신의 명령이라고 표현했다. 징기스칸 사후, 그의 용맹한 부하들과 , 아들들은 징기스칸이 차지한 땅을 훨씬 넓혔으니  

 

징기스칸만큼  부하들과 아들들의 충성을 받은 영웅은 역사상 또  있기나 하는걸까?

 

 

-징기스칸의 말-

 

 

"우리는 다같이 싸웠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향략을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사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죽은뒤에도  나는 세상에 위대한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아마 그들은 계속 내 이야기를 할 거요!”

 

-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징기스칸을 지난 천년간  인류사에 가장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선정했다

1995년 12월,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인물로 징기스 칸을 꼽았다.

 

 “징기즈 칸은 사람과 과학의 교류를 통해 지구를 좁게 만들어 세계를 뒤흔들고 근본적인 변화가 오게 만들었다.”고 선정 이유를 말했다.  

 

 

 칭기즈 칸은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1997년 4월 뉴욕 타임스 선정)’로 뽑히기도 했고, 500대 기업 CEO들이 뽑은 서기 1,000

 

년대 밀레니엄 최고의 리더(1997년 <포춘>지 선정)로 뽑히기도 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살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쫒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고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숙명이었고  내 직업이었다.

작은부족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는 십만

백성은 어린애 , 노인 다합쳐  이백만이 되지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말라

 

 

나는 내이름을 쓸줄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말라.

 

 

 

나는 목에 칼을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다가 살아나기도했다.

적은 바깥에 있는게 아니라 내안에 있었다.

나는 내거추장스러운것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나는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징기스칸이 되었다.

테무진이 징기스칸의 호칭을 받으며 몽골의 칸을 선출될때

 

 

부족들을 단합시키고,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갈때

 

부족민들에게 선포했던 시입니다.

 

 

 

 

 

▶2018/05/02 - [윤회,명상,종교] - 이순신장군 권율장군의

스승 구봉 송익필 선생님의 족부족

 

 

2018/03/29 - [정치,인물] - 2160년만의 물병자리전환

으로 한국의미래

 

 

지금 이시대를 사는 한국인 역시

남북통일과

만주고토 수복의 시대적사명 

 

시대정신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하루빨리

 

 

요즘을 사는 젊은이들이 시대사명을 깨닫길 바랍니다

그래서  남북통일 만주고토수복의 끝 꿈을 이루는 지렛대가 되길

 

 

바라며, 

끝없이  뻗어갈  강대국 한국을 세우길 바라며 ,

 

이만 징기스칸의 리더십과 몽골제국의 형성 편을 마칩니다.